archive/③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그 눈이 다시 나를 향해요. 당신이 이 구천에 뿌린 어느 생명은 늙어 제 명이 다할 때까지 무엇 하나 이뤄낸 게 없었으니, 그런 구닥다리에게 걸맞은 최후의 사명쯤이야 짊어질 법도 하지요. 마리아 님, 내리막길을 모르는 감정을 당신은 헤아려 주시려나요. 당신이 나를 점지하신 곳에는 희망이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좌절조차 쓸쓸해했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님,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몹쓸 몸뚱이는 당신의 평안을 위해 감히 인생을 내놓습니다. 돌아가거든 반겨주시려나요. 이렇게 앗아가시면 그제야 마땅하시려나요, 유복하시려나요, 당신은 헤아려 주시려나요⋯.

 

 

 

 

 

 

 

 

 

 

야반도주

그대 기나긴 밤을 지나서 본 적 있는가

 

 

 

 

 

 

 

 

 

 

 겨울이 오리.

 

 

 케케묵은 시골 방촌에서도 축제는 열렸다. 동네는 한창 전야제 준비로 어수선했다. 당일 역시 아침 댓바람부터 삐걱거리는 마차 소리에, 잠에서 깬 아이들이 많았다. 마을 곳곳에서 밤새 굳게 닫혀있던 창문을 하나둘 열어가자, 해를 가리던 구름도 갰다. 조금 앞당겨진 시간을 제외하고는 여느 때 없이 모든 게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두터운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찬기가 스즈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웬일로 맴도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눈코 뜰 새 없이 다가온 겨울맞이를 사유로 삼았다. 매해 돌아오는 11월 1일, 만성절을 구실로 한 분란함의 시작은 두 주일 전쯤이었다. 이는 진정한 성인(聖人)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행사로, 인적 드문 산골에 집터 몇 군데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며 곧장 생긴 전통 비슷한 문화였다. 추모를 겸해, 어째서인지 근방 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이날이 곧 입동이라 여기곤 했다. 가을 끝자락 찬 바람이 불어올 때면 활기를 띤 아베 마리아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물론 살아가는 낙이 그다지 없어 기댈 기둥을 필요로 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만성절은 가장 큰 경사나 다름없음이 분명했으나, 만으로 열아홉을 넘긴 소녀가 있는 집은 빠짐없이 긴장감을 가져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한숨도 못 잤단다."

 

 대충 예상했다는 듯, 스즈가 작은 콧소리를 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주무세요. 콧등 근처까지 그림자가 져 푹 삭은 인상을 한 어머니를 떼어놓은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았다. 어제와 같은 표정, 같은 옷. 천천히 손을 움직여 빗을 집어 든 다음 이어진 스즈의 행동은 마찬가지로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루틴의 일부였다. 썩어빠진 조건에서도 몸과 마음가짐은 단정히 하자는 그녀의 신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자고 일어났음에도 많이 망가지지 않은 머리를 빗어 내리는 그녀의 무릎에 자그마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널 두고 어떻게 그러니. ⋯아침으로는 수프라도 들겠어?"

 "괜찮아요. 아버지 챙겨 주세요."

 

 대화 내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의 어머니는 곧 환갑이었다. 반평생 노력해 늦게 얻은 귀한 딸을 어지간히 아끼는 모양새였다.

 

 "다녀올게요."

 

 단장을 마친 스즈가 몸을 일으켜 외투를 걸쳤다.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결국 현관 앞까지 쫓아온 어머니에게 그녀는 볼을 맞대며 작게 속삭여 주었다. 저 아직 여기 있어요. 금세 닿은 살의 온기보다도 따뜻한 무언가가 붙은 볼의 틈새를 타고 들어오려는 게 느껴지자, 그녀의 양손 역시 말라빠진 허리를 둘렀다. 바깥과 상반되는 삭막함이 집안을 꽉 채워 빠져나갈 생각을 않았다. 그녀는 비슷한 꼴의 공허함을 여럿 느낀 적 있었다. 작년에는 거의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던 이웃 언니네 집에서, 재작년에는 작은 언덕 하나 넘으면 나오는 사토 할아버지네 집에서, 그보다도 전에는⋯. 기억을 더듬던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곧장 표정을 굳히며 더 크게 엉엉 울어대는 어머니의 반응에 바삐 손사래를 치는 것도 그녀에게는 곤경이었다.

 

 

 

 

 

 스에하라 스즈가 승천자로 발탁된 건 일주일 전, 주말의 일이었다. 그 밤은 유독 고요하고 거룩하다는 표현을 빼닮아 보름달이 높고 짙었다. 동네에서 스물이 지난 처녀는 네다섯뿐이었으므로 후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전체 주민 수가 대단한 것도 아닌데 성당 안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였다. 누가 시킨 적도 없었으나 조건에 부합하는 여자들은 늘 그랬듯 가장 앞자리에 차례로 앉았다. 곧이어 목에 금 칠갑을 한 교주가 엄숙한 기운을 풍기며 걸어 나오자 자잘하게 울리던 소음마저 멎어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명에 따라 지상으로부터의 사신을 임명합니다.

 

 십여 년째 듣는 지겨운 문구. 맹신자라 부를 것도 없이,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보혜사님을 따르니 아마 기억에 없는 어느 순간에도 눈을 깜빡이며 경청하고 있었을 테지. 스즈의 어깨에 낯익은 손이 얹어진 건 그녀가 고개를 푹 떨군 채 덧없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장내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만족하는 법을 몰랐기에 투정의 불가피성 또한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부유함을 갈구하거나 지금보다 쾌적한 생활환경을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번 기도는 합당한 편에 속했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등을 철칙으로 삼으시되, 가난한 자에게는 복을 베풀고 풍족한 자에게는 나누는 삶을 권유하셔 온 세상이 하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어릴 적부터 가슴에 새겨온 기본 지식.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와 달리 부모의 뱃속에 생명을 점지하신 참 아비가 따로 계신다고 그랬다. 그렇다면 감히 아버지, 하나님, 평생 한 번뿐일 유일한 간청을 올려요. 그녀는 숙인 얼굴 아래 얇은 천으로 가려둔 두 손을 맞잡고 꼭 빌었다.

 

 살려주세요.

 

 결과는 처참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차례일 것이라며, 그녀보다 훨씬 떨고 있던 서너 살은 더 먹은 언니들을 피해 가고 어째서 하필 그녀가 지목된 것인지는 보혜사를 제외한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한 이치란다.

 

 "너를 더 볼 수 없어 슬프구나. 그래도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른 나이에 승천하게 된 것을 보아 믿음이 깊었나 보구나. 스즈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보혜사의 미소는 여태 눈에 담아온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갈 곳을 잃어 정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질겅이며 맛보는 듯한 부패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스즈가 이곳의 규칙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건 사 년 전 오늘이었다. 마냥 신뢰하던 보혜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모순을 눈치 챈 건 오직 그녀뿐인 듯했다. 그녀가 유년보다 더 성숙해져 배운 승천자의 배경은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하나님께서 여성의 배에 점지하신 목숨 중 몇 안 되는 숫자로, 밑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적절한 시기가 되면 돌아와 참 아비의 수많은 자식이 어찌 살고 있는지 직접 보고를 전하는 신의 사자. 그게 전부였다. 명줄을 대가로 한 중대한 책임, 막중한 임무. 게다가 승천하거든 예수께서 곁에 두고 영생을 살 수 있게 되므로 죽음은 곧 불멸을 손에 쥐는 것이라는 포장이 참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보혜사 선생님. 귀중히 여겨야 할 삶을 수거해 가는 존재가 우리의 참 아비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요.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가슴속에서 절규하며 그때의 물음을 목뒤로 삼켰던 일을 후회했다. 저는 불쌍한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을 독거노인으로 남겨둔 채 떠날 수 없는걸요⋯.

 

 얼어붙은 공기도 잠시, 보혜사의 전언을 들은 이들의 갈채가 성당을 메웠다. 믿음이 올곧은 소녀를 위해 모두 박수 쳐 줍시다! 스즈가 시선을 돌려 처음 목격한 것은 말을 별로 섞어본 적 없는 스물다섯 언니의 복에 겨운 미소였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보혜사의 아들과 남몰래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 탓에 얼핏 엮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던 듯했다. 안 그래도 적정기가 한참 지났는데 몇 년째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간다며 말이 많았다. 두 번째로는 눈물에 젖은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엉망이 된 표정에 그녀는 차마 입술조차 뗄 수 없었다. ⋯⋯아, 역시 아직 떠날 수 없는걸요⋯.

 

 

 

 

 

 집을 나선 그녀가 향한 곳은 성당 근처의 좁은 여관이었다. 오가는 사람도 잘 없었기에 돈벌이용으로 쓰이진 않았고, 보혜사의 요구에 따라 가끔 도시에서 올라와 진찰을 도는 의사들이나 방랑자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목적이 컸다. 끼익하는 낡은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반긴 건 제 어미만큼은 아니지만 비스름한 표정을 하고는 그녀를 기다리던 동네 여자들이었다. 전야제의 치장을 도울 인원치고는 제법 많았다.

 

 준비는 작년과 같이 대부분이 적막 속에서 치러졌다. 수수하고 단정한 예배용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은 경건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차례가 복잡한 준비 절차에 넋을 빼놓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정적이 깨진 건 삼십여 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네가 작년에 여기서 내 딸아이 머리 묶어줬던 걸 기억하니?"

 "그럼요."

 "오랜만에 만나겠구나. 가거든 내 안부도 전해주련?"

 "그럴게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언니는 곁에서 다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스즈가 미소 짓자, 대부분이 울음을 애써 삼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와중에도 스즈의 정신은 자물쇠까지 걸어 잠가둔 객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방은 지난해처럼 그 손님께서 와계신 건가요?"

 "그렇단다."

 

 닫힌 객실은 묘연한 추억 속 큰 언니들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순도순했던 또래 여자아이들까지, 여러 번 치장을 도와가며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중 하나였다. 전야제, 그리고 만성절을 똑바로 챙기는지 점검하기 위해 내려온 감시자가 묵고 가는 전용 공간으로 연중 이틀을 빼고는 늘 비어있었다. 아무도 그의 모습을 목격해서는 안 되며, 그 역시 승천자의 정체를 알아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예수를 넘어 성모 마리아께서 직접 마련해 하사하신 금기의 한 갈래라는 가르침으로 불렸다.

 

 "고개 돌리렴, 스즈."

 "아, 죄송해요⋯."

 

 언제부터 쳐다본 거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고개를 돌려가며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부터 입술을 꾹 닫았다. 한참이 지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시기가 되어서야 검은 베일이 스즈의 얼굴을 덮었다.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두컴컴해진 하늘 아래 성당의 환한 불빛이 이질적이었다. 성당 정문 앞, 야외에 설치된 전야제용 단상은 나무도 잘 다듬어지지 않아 몹시 초라했다. 보혜사와 나란히 양손을 합장하고 상체를 숙인 스즈의 앞에는 그녀의 여정이 평안하기를 기도할 취지로 근처 사람 모두가 모여 있었다. 개중에서도 며칠 전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서 조마조마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이 스즈의 눈에 띄었다. ⋯지금은 전부 가리고 있으니까 눈물 몇 방울 정도야 흘려도 괜찮으려나. 애써 아랫입술을 꾹 짓눌러가며 시선을 피한 스즈는 곧이어 뒤를 돌았다. 단상 계단을 오르며 다급함을 초월한 성급함이 느껴지는 발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녀의 드레스자락 한 줌도 잡지 못한 채 흐느끼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우리 딸 스즈.

 

 모두를 위해 안녕히 가렴.

 

 누군가에게는 신의 사자가 귀환하는 장엄한 순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별의 슬픔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한 치 앞으로 다가온 암흑의 순간으로 기억될 밤이 막을 내렸다. 이윽고 스즈가 암전된 성당 안으로 발을 내딛자 줄곧 외우고 살았던 익숙한 기도문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언제나 함께했던 풍경이기에 그녀에게 있어 등 뒤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얌전하던 바람도 겨울의 시작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양 그녀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정해진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돌덩이로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었다.

 

 

 

 

 

 

 

 

 

 

 

 

 그는 의뢰를 받은지 나흘이 되는 새벽이 되어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계약 조건이 그 이유였다. 좁아터진 시골 마을은 되레 더욱 경계해야 된다는 집안의 조언 그대로, 그가 묵을 장소는 여태 다녀본 어느 산골보다도 낡고 허름한 곳이었다.

 

 그가 타고 온 말은 한참 전에 버리고 다리로만 등산했으니 알이 배일만도 했다. 약도에 표시된 곳으로 들어서자마자 대놓고 열린 방문 하나가 그의 눈에 밟혔다. 적당히 낌새를 살피던 그가 청한 잠 이후 맞은 다음 날 아침, 누가 해둔 건지 문은 단단히 닫혀있었다. 협탁 위에는 고용인의 필체로 보이는 쪽지 한 장과 빵 몇 조각이 놓여있었다.

 

 밖에서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는 을의 입장이므로 반박할 의사도 없었다. 어차피 내내 걸어 올라오느라 힘도 들었겠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다 적당히 할 일을 마칠 셈이었다. 2층 치고는 제법 높은 편이네. 그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던 그때, 문 너머에서 실내용 구두 여러 켤레가 정신없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보아하니 손님이 온 듯했다.

 

  '이런 데에도 투숙객이 있는 건가?'

 

 정말로? 그러나 그가 단순한 호기심이 일어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들은 내용은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쟤가⋯.'

 

 어쩐지. 그는 더 이상 관심 두지 말자며 등을 돌렸다. 눈 감은 채 마지막으로 상기해 본 상상 속 인물의 목소리는 이곳에 오는 내내 떠올렸던 것에 비해 훨씬 맑고 청아했다. 나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이는데. 괜한 동정심도 동질감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게 이쪽 일이고. 이내 잠시 눈을 붙인 그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어 밖은 어두웠다. 꼼짝하지 않던 문 또한 활짝 열린 채로 그에게 어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라 부추기는 듯했다.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린 그는 금세 몸을 일으켜 가방 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아레스. 집안에서 의뢰 진행을 위해 붙여준 그의 이름이었다.

 

 여관 밖으로 나서자마자 아레스는 금목걸이로 치장을 한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레스를 고용한 본인이라 소개하며 증명이 될 만한 계약서 몇 장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오늘 일은 전부 비밀에 부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또, 그 애의 얼굴을 절대 들춰선 안 돼."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당신네랑 몇 년째 협업 중인데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보냈겠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크게 웃는 남자의 뒤통수는 무척 들떠 보였다. 여관에서 성당까지는 금방이었다. 아레스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람들을 물린 후인 건지 근처가 고요했다.

 

 

 

 

 

 싸늘함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반질반질한 바닥 표면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인해 스즈의 다리는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잠잠한 공기 속 들리는 소리라고는 촛농이 떨어지며 내는 소음이 전부였다.

 

 스즈는 인내하며 손을 꼭 모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작은 염원에 손 내밀어 주시겠어요? 누군가 어찌 보면 존재 여부도 잘 모르는 허상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호기로운 시도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이 시점에는 아마도 그녀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놓고 있던 새에 시끄럽게 메아리치는 정문 소리가 스즈의 몸을 파들 떨게 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차분함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거리는 발걸음으로 상대가 남자임을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었다. 소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소리를 내봐."

 "⋯⋯네."

 

 냉담한 대화가 물 흐르듯 오고 갔다.

 

 "두렵지 않나?"

 "가져가세요."

 "뭘?"

 "노리고 오신 것을요."

 

 눈 감고 있을 테니 어서 가져가세요. 제법 날이 선 대답에 아레스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여리면서도 강인한 속내를 담은 목소리는 분명 그가 오전에 들은 것과 닮아 있었다. 긴장한 걸까, 체념한 걸까?

 

 "⋯죽음을 바라?"

 

 스즈의 전신에 처음 겪어보는 감촉이 파도처럼 진동했다. 느리지 않은 속도였다.

 

 "⋯그런 적 없어요."

 

 그는 줄곧 심통이 나 굵직하던 언성이며 곧게 뻗은 뒷덜미가 약하게 떨어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웃음을 삼켰다. 아레스가 스즈의 등에 가져다 댄 건 아직 갈지 않은 칼끝이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게 하려 힘을 완전히 뺀 상태였다.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우셨던 걸까, 여태껏 전부. 그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 스즈의 계산 밖으로 자꾸 치솟기만 했다. 물론 그녀는 떠나보낸 이들의 최후에 대해 굳이 떠올려 보려 한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외의 일이 발생하리라는 각오를 분명 갖고 있었다. 얼굴을 숨기고 등마저 돌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목숨을 회수하러 왔다는 신의 감시자는 어떻게 뜯어 봐도 성스러운 아우라를 가진 건 아닌 듯했다. 묻고 싶은데. 그렇지만 죽음을 몇 초 남겨둔 주제에 잘도 떠든다고 생각하실 테지. ⋯그래도, 물음을 미뤘다가 후회한 결과가 지금인걸. 다소곳이 모은 손가락을 티가 나지 않게 꼼지락거리던 스즈가 결국 입을 뗐다.

 

 "⋯작년에도 이렇게 말을 걸어 주셨나요? 그해에 승천하신 언니랑은 어떤 대화를 나누셨지요?"

 

 꼬리를 내린 그녀의 음성은 여러 의미를 연상케 했다. 불안이 없는 척, 고고한 척 애를 썼지만, 너도 무서웠구나. 퀴퀴한 각지를 누비며 인간의 최후를 거머쥐어 온 아레스의 손과 뇌가 직접 동했다. 그가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밟지 않으려 신경 썼던 기다란 치맛자락만큼이나 곱게 흘러내린 머릿결이, 간만에 듣는 포근한 음색이, 현실을 직면하지 않은 채 어서 회피하려는 듯한 근심에 젖은 어투 하며⋯.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들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뜨리니 요란했던 등장보다도 더 날카로운 소음이 성당의 공기를 짓눌렀다.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어?

 

 "드러내도 되겠어?"

 

 스즈는 잠시 망설였으나 거절하진 않았다.

 

 "좋을 대로 하세요."

 

 베일 뒤에 감춰진 소녀의 모습이 그의 앞에 드러났다. 그녀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는 가만히 정면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높이를 맞추려거든 아레스가 무릎을 먼저 꿇는 편이 빠를 듯했다.

 

 "⋯⋯너, 몇 살이지?"

 "곧 스물이에요."

 "살고 싶지?"

 "살려 주실 건가요?"

 "나랑 도망갈래?"

 

 그제야 눈동자를 데굴 굴려 그와 눈을 맞추는 스즈의 시선은 감정 가리기에 급급해 보였다. 사실 놀랐으면서. 사실 무척 긴장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칼은 버렸으니까 안심해.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아레스가 피식 웃었다.

 

 "너나 나나, 이미 성모 마리아 앞에 떳떳한 인간은 아니니까. 같은 처지끼리 너무 경계하지 말자고."

 "⋯⋯."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던 신의 감시자는 이제 그 자신도 갈 길을 모르는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내가 네 영원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어도, 네가 여태껏 본 적 없을 최고의 야경 정도를 선물해 줄 수는 있지. 그리고 언젠가 준비를 마치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거야. 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거든.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여기가 좋은 거지? 떠나고 싶지 않은 거지?"

 "⋯⋯."

 

 스즈에게 반박의 여지란 없었다. 전부 정답이었고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이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거나⋯ 갑자기 돌변한 태도가 의심스러워 그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 줄 사람이 나타난다면요? ⋯그게 마리아 님이라면요?"

 "그럴 것 같아? 글쎄, 그건 네 판단 나름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 굽힌 무릎을 피며 자세를 고친 아레스의 손이 방황하는 그녀 앞에 내밀어졌다. 다 죽어가는 생명을 연장할 기회는 몇 없어. 아레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스즈에게 요 며칠 새에 일어난 모든 일은 까마득해 수습할 시도조차 못 했던 것만이 진실로 남아있었다. 모두를 위해 안녕히 가렴. 그녀가 일그러진 어미의 울음을 상기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게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꼭 맞잡은 채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외치던 그녀의 손은 삽시간에 풀렸다. 그녀가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내 미소 짓는 아레스의 너머로, 외로워 보이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었다.

 
 

written by @sorainmymind

 

DALBOM